#아일랜드#리조트#회장의 아들은 어느 집의 돈과 권력으로 무장하고 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나이 60대에서 다음과 같은 여자 관계를 유지한 최·태민은 정말입니다. #최·태민 당시 나이가 들어 뭔가가 잘못된 점은 힘든 듯이도 보입니다.https://blog.naver.com/h9pkec/222229923479
아일랜드 리조트 골프장 권·오용크오은·모세 세계 투데이 세계 미디어 세계 TV권·효쿡오은·정혁 권· 연 아일랜드 리조트 골프장 권…모세 세계 미디어 세계 TV권·효쿡오은·정혁 권·영 샤크라이 많이 2009년…b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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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정상 에어장의 장·효히 추락사 2003년 12월#한국 기업 총 연합회 공동 회장인#장·효히 목사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래 전의 일에 대해서 고인을 폄하하려…blog.naver.com
계약 톰슨:/챔피언스리그는 안 돼.저 아가씨. 구미로 / 9무로 / 221805688488
박근혜 책 또 하나의 가족, 최·태민 박근혜 임·성의 조·이순재-김·장 그럼 우·뵤은우, 박·그네의 책, 오랜만에 책 한권 샀어요. 포인트로 결제. 그것은 정독. 내가 소개하는 내용은… 그렇긴.blog.naver.com
계약 톰슨:/챔피언스리그는 안 돼.저 아가씨. 구미를 나오다/9무로 나오다/221812390693
구국 선교단 단장 강·신명 목사 구국 십자군 박·정희 박근혜 최·태민 전두환 한·교은직 1975년 최·태민 총재가 이끄는 구국 선교단의 단장이 새문안 교회의 강·신명 목사(1909~1985년)이었다. 강·신명, 정부-blog.naver.com[추적 논픽션 비밀 권력]<10화>박근혜 앞세운 구국 선교단의 돌진 기사 입력 2017-04-231-10화, 박근혜 앞세운 구국 선교단의 돌진 최·태민은 박근혜에 만난 이후 신흥 종교”영세교”간판을 급히 내린 대신”대한 구국 선교단”을 세운다. 최·태민은 박근혜에 만나서 1개월 후의 1975년 4월 10일 영세교의 간판을 내린다”대한 구국 선교단”를 창립했다. 그는 4월 29일 대한 구국 선교단 총재가 된 뒤 1978년 2월 박근혜가 총재를 맡까지 구국 선교단을 이끌었다. 중앙 정보부는 “박근혜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유사 종교인을 중심으로 대한 구국 선교단을 설립하는 총재로 취임” 했다고 분석했다(중앙 정보부, 1979.10.23,4쪽 참조).최·태민은 요즘”최·태민”라는 이름을 쓰고 4,5월경에는 기독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최·태민 증언이다. “1975년 1월 종합 총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5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의 속하는 신학교와 교단이 사기꾼으로 몰아붙이는 데…”(유인종, 1990.12a, 255쪽)그러나 일각에서는 최·태민이 돈을 주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총회의 조·현정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백·상현, 2016.11.21;윤·박석진, 1993.11,211쪽;타쿠·박명환, 1988.5,148쪽 참조). 조·담당 목사는 일본 대학을 졸업한 뒤 경찰 간부를 거쳐서 1970년 종합 총회 2대 총회장으로 알려졌다. 조·현정은 1개월 만인 6월 21일 서울 배재 고등 학교에서 열린 대한 구국 선교단 산하의 구국 십자군 창군식 사회를 맡기도 했다.1975년 9월 5일 당시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구국 선교단 및 의사 협회 간부들을 초청하고 행사를 열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최 야스토시(최·태민)전 구국 선교단 총재(당시)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 사이에 흰 원피스를 입은 당시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가 나고 있다. 국가 기록원1975년 9월 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구국선교단 및 의사협회 간부들을 초청해 행사를 열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최태민 당시 구국선교단 총재와 악수하고 있다. 그 사이 흰 원피스를 입은 당시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서 있다. 국가 기록원1976년 2월 12일 박정희(박·정희)당시 대통령이 대한국 선교단이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소뎀은그·아효은동)에서 운영하던 무료 야간 진료 센터를 방문하고 당시 퍼스트 레이디 대행의 박근혜, 최 야스토시(최·태민)구국 선교단 총재들과 함께 병원을 둘러보고 있다. 국가 기록원대한 구국 선교단은 8월 27일 오후 방한 중이었던 제임스·슐레진저 미국 국방 장관에게 “한국은 아시아의 승리의 보루”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한국의 지원을 건의했다. 슐레진저는 8월 26-27일 2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연례 안보 협의 회의(SCM)에 참석하고 박정희(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를 설득하기 위해서 방문했다는(조갑이 끝난, 2006b, 40-42쪽;『 경향 신문 』, 1975년 8월 28,7면 참조).정·기 영 예장 통합 총회장 목사는 이와 관련,”최·태민이 주도한 대한 구국 선교단은 기독교 진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다”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에 의한 사회적 반발이 커지면서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이 승규, 2016.10.29;최우 주석, 김 마사 카타, 2016.12,237쪽 참조). 종교 연구가의 타쿠·박명환도 구국 십자군 창설은 “한국 기독교가 남침 위협을 내세운 독재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개탄했다(타쿠·박명환, 1988.5,144쪽 참조).최·태민은 박근혜 일가에 대한 노골적인 충성 분위기를 유도했다. 8월 14일 오전 9시 서울 동작동 국립 묘지에서 열린 육영수(육모·연수)여사의 1주기 추모 예배에 대한 구국 선교단의 회원 800여명이 참석, 육영수를 애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동아 일보 』, 1975년 8월 14,7면 참조).최·태민이 박근혜를 앞세우고 구국 선교단을 운영하는 그의 송년회의 감상이 언론에 실리는 등 영향력이 커졌다. “비밀의 실력자”가 된 것이다. 최·태민 송년회의 소감이다. “인지 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하게 된 국방력 강화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구국 십자군을 창설한 것 이와 함께 기독교인이 더 단결하게 된 것,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하나의 방법으로서 야간 무료 진료 센터를 개설한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조·가프지에, 2006b, 65쪽에 인용)비밀 권력 기록 팀=김·영철, 이·청정, 조·변 우크라이나, 박·영준 기자 [email protected]://m.segye.com/view/20170421003279[추적 논픽션비 선 권력]<10화>박근혜 앞세운 구국 선교단의 돌진 1-10화, 박근혜 앞세운 구국 선교단의 돌진 최·태민은 박근혜에 만난 이후 신흥 종교”영세교”간판을 급히 낮추고 대신”대한 구국 선교단”을 세운다. 최·태민은 박근혜에 만나서 1개월 후의 1975년 4월 10일 영세교의 간판을 내린다”대한 구국 선교단”를 창립했다. 그는 4월 29일. m.segye.com계약 톰슨:/챔피언스리그는 안 돼.저 아가씨. 구미를 나오다/ 9무로 나오다/ 221797035924최·태민-역사상 유일무이한 승려 겸 목사 겸 의사 종교 교주 정말 대단합니다.내 금세는 치졸한 월급쟁이에서 실패했습니다.내세에 대한민국에 다시 태어나면 최 태민과 같은 사람이….blog.naver.com계약협상:/WorldWideWeb아르마니자금조달자/6500[서울의 목소리]”최·태민 비리 자료”79년 중앙 정보 부장 김·제규 보고서 공개, 무슨 이유로 ” 죽은 최·태민이 선 박근혜의 발목을 잡고 있나”라는 것이 세인의 관심사에 틀림 없다. 이 보고서는 1979년 10월 23일(박정희가 죽3일 전), 돈 재규(김·제규)중앙 정보 부장이 박정희에 직접 www.amn.kr”최·태민 비리 자료”79년 중앙 정보 부장 김·제규 보고서 공개 일제 경찰 부장 출신에…구체적인 비리 사실 여자 관계, 이권 개입 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서울의 목소리| 입력:2012/08/19최태민 비리자료 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보고서 공개일제경사 출신으로…구체적인 비리사실, 여성관계, 이권개입 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서울의 소리 | 입력 : 2012/08/19미주 한인 신문 선데이 저널 USA특별 취재 팀 https://namu.wiki/w/박근혜와%20최·태민%20부적절한%20관계박근혜와 최·태민 부적절한 관계-남 우이키팍·그네 관련 문서[전개·종이 접기] 박근혜 정부·어록·말·별명, 자택 정책 쵸이 노믹스·노동 개혁·임금 피크제·국정화 교과서·창조 경제·유라시아 이니셔티브·행복 주택·뉴 스테이·테러 방지 법·위안부 합의·한일 군사 정보 포괄 보호 협정,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문화의 어느 날 평가 비판 대통령 이전·경제·외교·지지율 정책 분야·민주주의 후퇴, 자질, 역사관·개인 대처 문제·최·태민과 부적절한 관계·유사 종교 논쟁·이·이·이·묘은박 청와대 사건·namu.wiki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그에 따른 논란을 다룬 문서다.최·태민에서 정·유라까지 40년간 총 정리 최·태민은 1975년 박근혜에 ” 죽은 육모·연수 여사가 꿈에 나오면서 박근혜를 구한다고 말했다”라고 편지를 보내고”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최·태민)를 통하면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1]라는 등 박근혜의 환심을 사고그 후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2]실제 최·태민은 박근혜에 “어머니는 죽은 것이 아니라 박근혜 시대를 열기 위해서 길을 양보했을 뿐”라거나”아시아의 지도자”,”여성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외부 활동을 권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최·태민 주변에는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을 비롯한 권력형 비리, 그리고 모든 여성 관련 스캔들 의혹이 터졌다. <월간 중앙>1993년 11월호는 당시의 분위기와 관련하고, 박근혜가 지역에서 열리는 구국 봉사단과 새마을 봉사단 행사에 참가하면 관내 각급 기관장과 그 지역에 관련된 중앙 부처 고위 공무원, 국회 의원이 총 출동했다고 전했다. “측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 야스토시(최·태민)총재의 지위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그 뒤 최·태민 씨는 도 지사와 경찰 국장을 전화로 불러내서 호통치는 정도였다.1977년 중앙 정보부 『 수사 자료 』에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 받은 정부, 정치권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로 기록됐고,”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던 “으로 알려졌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최·태민을 탐탁치 않아 최·태민을 밀어내려 했지만,#박근혜가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최·태민을 두둔하고 의견이 바뀌면서 최·태민은 사망할 때까지 박근혜의 옆에 위치했다. #10·26사건 후 돈 재규은 1980년 1월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 최 야스 재빠르게 언급한다. 김·제규 항소 이유 보충서 본인이 결행한 10·26혁명의 동기 속에서 간접적인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의 하나는 박 대통령과 유신 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 가족에 관한 것이어서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지만 꼭 밝힐 필요가 있으니 이 자리에서 밝히겠다고 생각합니다. 구국 여성 자원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 총재에 박근혜 양이었지만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으며, 그래서 국민, 특히 여성 단체의 원성으로 되어 왔는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하나의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어 더 박·순규 민정 수석 비서관조차 말도 못하고 중앙 정보 부장인 자신에 호소하는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당시 백·김광현 안전 국장을 시키고 정밀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궁헤 너의 말과 달리,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부모국까지 했고 그 결과 최·태민 부정 행위를 정확히 파악하면서도 궁헤와 그 단체에서 손을 떼기는커녕 오히려 궁헤와 총재로 최·태민을 명예 총재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앙 정보부에서 조사 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고 있을 것입니다.여기서 박·순규 민정 수석이 김·제규에 직접 호소했다는 부분도 중요하다. 민정 수석 비서관은 청와대에서도 5개의 손가락에 꼽히는 요직이다. 유신 독재 때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박·순규도 방안이 없고 중앙 정보부에 힘을 빌렸다. 그래서 박·정희의 왼팔인 김·제규가 직접 나섰지만 상황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했다.당시 김·제규의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10.26관련 책을 썼지만, 신동아와 인터뷰를 하고 그것이 2005년 12월호에 실렸다. 당시 김·제규가 최·태민에 주목했다는 점을 역시 증언하고 있다. 김 재규(김·제규)씨가 우발범인지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회복에 나섰던 확신범이나 양심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쳤다는.”김·제규와 몇 차례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을 느끼지요. 식다는 것은 느낌으로 나타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김·제규는 공개된 법정은 안 밝혔지만”10·26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아이들의 문제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어요.”김·제규는 최씨의 박근혜가 관여한 구국 여성 자원단의 부정과 입[3]을 보고분개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대통령과 박근혜 자신의 쓸모 없는 “으로 판단하고 조사를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각종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더니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부인의 육모 여사가 돌아가신 후부터 아이들을 애무하고 철저하게 감싸고 돌아갔대요. 구국 여성 자원단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시 항간에 말이 많은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 총재를 맡고 있었지만, 김·제규가 구국 여성 자원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뒤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 총재가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 실권을 빼앗는다는 일로 두 사람의 자리를 교환한 것입니다. 김·제규는 자신이 까닭 없이 조사를 하고, 오히려”개악”가 되었다고 해서 뒷조사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싱동아 2005년 12월#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박근혜 씨를 잡은 목사 최·태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김·제규는 각하에게 그의 비리를 보고했으나 박근혜 씨가 비호, 각하 앞에서 대질 부모국에 당한 수모를 받았다. 천하의 정보 부장이 사이비 목사[4]와 나란히 앉아 버텼다는 것은 사실에 굴욕이었다. 79년 11월 합동 수사 본부의 기록에도 김재규의 증오가 드러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이다.<김 부장은 “최 같은 사람들은 백해무익하니까 교통 사고라도 나고 죽어 사라져야 한다”와 증오를 보였다. 새마을 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위선 목사 최윤희가 사기 횡령 등 비리 사실에서 퇴임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기업들의 사장을 운영 위원으로 선임하는 기부금을 인출하는 등 새마을 운동의 취지를 흐리며 동향을 감시한다는 김 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의 내사 결과 최 씨의 이권 개입, 여자 봉사단원과의 스캔들 등 비리 사실을 탐지하고 돈 재규 부장에게 보고했더니 그렇게 말했다.>””(1991년 동아 일보에 연재된 기획물 『 남산의 부장들 』 발췌, 김·중식 기자 집필)[5]아시아 경제 2016-09-23 08:16#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게재된 『 남산의 부장들 』 107말 링크2016년 10월 29일 최·태민 구국 선교단은 박·정희의 지시로 창설되어 그 목적은 민주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라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를 부르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진보 기독교 세력이 강하다며 이를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 야스토시(최·태민)씨에게 보수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주문한 것이다.노컷 뉴스, 2016-10-29 20:15최·태민은 1980년대, 박근혜가 이사장을 지낸 육영 재단에서도 권력 남용으로 안팎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1986년부터 육영 재단 어린이 회관에서는 최·태민과 그의 5여자 최·숭실이 박·그네와 친분을 과시하는 전횡을 일삼고 문제가 됐다. 또 최·태민에 먼저 보고해야 이사장(박근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숭실 부녀의 인사 개입 등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쟁은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여동생의 박·쿵료은에 이사장직을 물려주까지 이어졌다. <중앙 일보>는 1994년 최·태민 부고를 전하면서”최 씨는 최근까지 궁헤 씨의 생활비를 내고 재산 관리인인 체하고 왔다고 전해진다”고 보도했다.<여성 중앙>가 육영 재단 어린이 회관 직원들을 취재했지만 박근혜 이사장은 일주일에 2차 결재하러 왔지만 이에 앞서제대로 된 직함도 없이”최 회장”으로 불리던 최·태민이 먼저 본 뒤”OK”를 안 하면 결재가 오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딸인 최·숭실은 자신이 주도하는 연구소를 통해서 육영 재단이 간행하는 잡지의 편집에 관여한다는 비판을 사고, 잡지”어깨 반”과 “꿈의 나라”는 마침내 휴간 처분됐다. 학생 회관 직원 140명과 기자 16명이 권고 사직에 있는 반면 최·숭실의 쵸이 종합 학원 교사들은 아동 회관에 오히려 입사했다. 1987년 9월이 보잘 것 없다. 직원들이 최·태민, 최·숭실 부녀의 개입을 규탄하고 7일 간 농성을 벌였다.하지만 박근혜는 1988년 8월 레이디 경향과의 인터뷰에서도 “최 목사는 새 심장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곁에서 도움을 준 분”이라며”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사심 없는 사람”이라는 등 최·태민을 강력히 옹호했다. 계속”최 목사에 직접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 점을 인정할 것”이라는 확신도 남겼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정·요옥 전 의원이 저서”오만과 무능”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최·태민은 92,3년, 즉 박근혜가 40세 가량의 나이가 되도록 기업인으로부터 돈을 끌어내는 데 활용했다는 것. 기업의 여성 사장들의 모임에 박근혜를 데리고 방문하고”박근혜는 미래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영애(박근혜)를 모시고 이 나라를 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얘기를 하다가 여성 사장들에게서 돈을 끌었다고 한다. 이 때 박근혜는 이런 최·태민 행동을 봐도 웃고만 있었다고 한다. 정·요옥은 이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돈을 가지러 다니는 노인과 빙그레 웃으며 앙발 소녀”에 비유했다.정·요옥와 정·두 온 이 제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1970년대 최·태민은 박근혜를 이용하고 기업가에 돈을 가로챘지만 현대 그룹의 전·박주영 회장은 최·태민을 매우 혐오하고 당시 이명박이 대신에 갖다주었는데, 그 때문에 최·태민과 최·숭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근혜를 대통령이 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란다. 이것이 현대 그룹 하나만 있는 일이 절대로 없었을 것이므로 적어도 제4공화국 시대부터 존재한 기업은 최·태민 전횡을 경험하고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박근혜는 1993년 11월 동아 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구국 선교단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므로,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이라며”나를 공격하려 했으나 명분이 없어서 나를 곁에서 도움을 준 분들을 괴롭힌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최 목사는 구국 선교단 때부터 계속 나를 도우세요, 책임도 맡은 앞장 선 분이라 특별히 표적이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계속”아버지의 배려로 모든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혜택을 배신한 화류은아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등 최·태민을 싫어했던 김·제규에 대한 악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도 했다.한편 박근혜는 당시 동아 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건강 보험에 대해서”새마을 봉사단이 전국적으로 한 무료 의료 봉사 활동이 계기가 되어서 만들어진 “이라는 주장도 남기고 눈을 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1994년 8월 12일 박근혜는 MBC아침 뉴스 프로그램”뉴스 와이드”에 출연하고”최…태민은 흑색 선전에서 부정 축재자에 몰린 “이라고 말했다. 당시 함께 박정희(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묘지를 참배하고 인터뷰를 한 사람은 박영선(박·영선)함께 민주당 의원이다.박근혜의 매제인 신·동욱(박·쿵료은의 남편)은 “육영 재단에서 전횡을 휘두르는 최 씨 일가를 단속하려 하자 박근혜가 최·태민을 감싸고 돌며 『 최·태민에 언급하면 천벌을 받은 』다고 말했다”과 천벌씩 운운하며 감싸고 돌았다고 증언했다. #또” 할 말이 있으면 최·숭실을 통해서 말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야스토시(최·태민)일가의 육영 재단 전횡 논란에 대해서, 07년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에서 “최 씨는 재단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순전히 오해이다”와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06년과 07년 청문회에서 최·태민과 그 가족의 부정 행위에 대해서 박근혜는 최·태민이 모략을 받기로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며”최 목사(최·태민)은 내가 고단한 시대에 나를 도운 사람”이라며” 고마운 훌륭한 분”으로 그를 끝까지 감쌌다. 최·태민과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톤이 높아지면서 최·태민이랑 아이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불쾌감을 표시하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느냐고 묻자”아기가 있다는 아무래도 말할 수 없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DNA검사에서도 그러니까 아이를 데리고 온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에도 최·태민이랑 사이에 감추어 둔 사생아가 있다는 의혹이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측근 김 용환(김·이 황 전 새누리당 상임 고문이 박근혜 당선자와 단독 회동에서 박근혜에 최 야스토시(최·태민)씨의 그림자를 지워야 한다고 조언하자 박근혜는 표정이 차갑게 바뀌어”이런 말하면 나를 지지했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박근혜는 김·영 팬들과 접촉을 완전히 끊다. 대통령 선거 전까지는 매일 조언을 구했던 멘토를,”최 야스토시(최·태민)의 이야기를 한번 꺼냈다”라고 단언했다. 정·요옥 전 의원에 따르면 박근혜는 누군가 최·태민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에 푸른 힘줄이 돋은 채”최·태민을 욕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로 화났다고 한다. JTBC의 이·규용의 스포트 라이트에 따르면 최·태민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것. 이는 현 꿈 얘기에서부터 시작되고 박근혜의 인생과 발언[6]과 너무도 잘 부합하고 뒷말이 무성하다.이, 상헌 기자가 최·숭실의 사촌에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간단히 말하면 권력과 억압에 의해서 호적이 파였다”며”최·숭실 씨에서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이모(임·성의)가 남자는 모두 호적을 판 “이라고 말했다. 시중에는 잘”최·태민 보고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비리 전력 등을 담은 문서가 나돌고 있다. 이 문서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문서를 최초 보도한<신·돈 아>관계자는 “보도 이후 참여 정부 말기의 여당 고위층의 개인 홈페이지에 『 안전 기획부 』라는 별명으로 이 문서가 잠시 올라왔다. 삭제된 적이 있지만 그것이 확산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잘 중앙 정보부의 문서 등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문서 자체는 안기부 시절의 198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서 1912년생 최 모, 태민이 76세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박·정희가 김·제규 중앙 정보 부장을 부르고 최·태민 조사를 시켰다. 김·제규는 경찰 정보, 대인 정보 검찰 정보 보안사 등 일종의 “오피셜 인텔리젼스 루트”에서 최·태민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중앙 정보부가 박정희의 책상 위에 얹다 보고서는 이런 공식 루트에 기초한 정보였다. 중앙 정보 통신부가 내놓은 보고서는 1980년 전두환 정권 이후 최 야스토시(최·태민)씨를 재조사할 때 만들어진 합동 수사 본부 문서, 그리고 그 후의 “안기부 문건”골격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1977년 9월 12일 최·태민에 대한 이른바”부모국”이 열렸다. 김 전 국장이 전하는 실상은 이렇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재규를 부르고 이야기를 들은 후 다시 차·지쵸루을 불렀다. 회의를 한 뒤 차·지쵸루에 쿵…영애(박근혜)이 “최·태민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으로 모략하는 “라고 매달렸다. 차·지쵸루은 왜 박근혜가 최·태민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처음은 몰랐다.”03년 한국 일보가 단독 보도한 돈 재규(김·제규)의 옥중 수양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79년 음력 12월 11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1. 구국 여성 자원단과 큰 씨(여러번 건의했지만 관여하지 말라는 분노만 산). 2. 육군 사관 학교의 명예 제도와 박지만(박·지만)학생의 흰색 광현(백·김광현)고등 검찰청 검사가 조사를 담당했다(당시 6국장)돈 근수(김·군ㅅ)공정 제6국장이 사실상 전 모를 파악하고 있다.참고:최 의민의 전화 도청에서 최경주가 일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기록을 국장 소지 보관 중)*위 내용은 혁명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만,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 일이라. 돕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여기에 기록하고 자세한 것은 훗날 백 검사와 김·궁스 국장이 조사한 결과.당시 김·제규가 “아이들”이라고 일축했다 대통령 저격의 직·간접적 계기가 된 그 인연은 37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을 무기력한 세파에 마키코마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김 케이 이후(김·교은레)전”경향 신문”편집 국장(88)은 금 재규(김·제규)씨가 박정희(박·김정희)씨를 쏜 것은 최 야스토시(최·태민)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최·태민 부모국을 기점으로 차·지쵸루은 김·제규를 박·정희에서 차단했다. 김 재규(김·제규)뿐 아니라 장관 등 각료들도 박정희(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려면 차 지철(차·지쵸루)씨를 거쳐야 했다”김·교은레 전<경향 신문>편집 국장그는 “박근혜가 최순실 건을 빨리 털어놓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우려했다.최근 박근혜(박 근혜)은 최·태민에서 “신의 계시로 몇년만 참고 기다리면 여왕이 되는 것이며 친척 등 외부인에 만나면 부정을 타므로 접촉을 피한다”라고 해서 친동생인 박·지만에 대해서까지 접촉을 제한했고(한 가운데)박·지만이 다른 사람의 유혹에 빠지고 최·민 최고참의 언니 최·태민이 다른 사람의 유혹에 빠졌다. 레이-“박근혜(박 근혜)최면을 걸고 육 여사의 환상이 나타나도록 하고 주고 환심을 사고 있다”-“최·태민(최태민)과 내연의 관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최근 박근혜(박근혜)는 최태민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로 몇 년만 참고 기다리면 여왕이 되니 친척 등 외부인을 만나면 부정을 타게 되니 접촉을 피하라”고 하여 친동생인 박지만에 대해서까지 접촉을 제한하고 있으며 (한 가운데) 박지만이 다른 사람의 유혹에 빠지고 최민의 맏언니 최태민이 다른 사람의 유혹에 빠져 있다. 여-“박근혜(박근혜)에게 최면을 걸어 육 여사의 환상이 나타나게 해줘 환심을 사고 있다”(최태민)순수한 내 누나에게 교묘하게 접근해 누나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최 씨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누나인 박근혜의 청원[7]를 단호히 거절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야 최 씨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제 누나도 최 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요.최씨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누나인 박근혜의 청원[7]을 단호히 거절해 주시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야 최씨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제 누나도 최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박근혜의 여동생 박·쿵료은과 남동생 박·지만은 1990년 8월 14일 당시 노·테우 대통령에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썼다. 박·쿵료은이 직접 쓴 이 편지에는 제기·태민 전횡, 비위를 주장하는 내용”(최·태민은)순수 우리 언니에게 교묘하게 접근하는 언니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이라며”이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않으면 언니와 우리는 영원히 최 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으로 희생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각하 내외 분이 언니인 박근혜를 만나세요 아니면 이 점을 최 씨가 교묘히 이용 해서 우리 언니를 자신의 손에 넣어 그 강대한 힘을 오히려 우리 유족 탄압에 역이용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계속”지금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참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 다가왔다.”로서 최·태민과 비리와 전횡을 길게 서술했지만 그 분량이 A4용지 5장이다. 특히 최·태민 금전 사취는 언니의 박근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신의 치부 행위가 폭로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계속 언니를 자신의 방패 삼아 왔다”며”(최·태민은)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육영 사업 장학 재단, 문화 재단 등 추모 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하고 회계 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고 많은 재산을 착취한 “이라며”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한 인격 모욕을 서술한 부분이 있지만”(최·태민은 경비원을 언니에 달고 우리 형제와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다”이라며”이로써 우리 형제는 서로가 근처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듣지 못하고, 전화 통화조차 못하는 실정”이라고 썼다.부모의 명예 훼손과 관련해서”최 씨는 부모의 유덕을 기리는 기념 사업회를 형식적으로 만들어 두고 이름만 『 박·정희 대통령 육모·연수 여사 기념 사업회 』인 실제 내용은 최·태민 기념 사업회로 전락하고 있다”며”누나 박근혜가 대표 이사권이 있다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다”고 밝혔다.이 편지가 작성된 시기는 최·태민이 육영 재단 고문을 맡고 있을 때이며, 박·쿵료은으로 숭모회란 단체는 “최·태민이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로서 최·태민 퇴진을 주장했다.박근혜의 여동생 박·쿵료은 씨는 “아버지가 죽기 전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는지”라는 질문에 “당시 언니가 있어야 『 한번 만난다면 두번 만나고 두번 만나더라도 세번 보세요 』, 이런 말을 했다는 “로 “어느 분”이 바로 최·태민이었다고 밝혔다. Q:박 이사장이 최·태민 목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언제?A: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최·태민 목사라는 사람이 언니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면서 만나길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분을 만나지 않도록 했다.Q:” 만나지 않도록 했다”라고 하면 이미 그 전에 박 전 대표와 최 목사가 만났다는 것인가.A:1,2회 회장에서 만난 정도는 아닌가 싶다.Q:그 때가 정확히 언제?A:누나의 대학 재학 시절이라고 알고 있다. 프랑스 유학 가기 전이다.Q:그는 대학 졸업 후, 언니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다고 했지만 그때 최 야스토시(최·태민)목사의 실체를 전혀 몰랐을까.A:당시는 나는 누나를 돕는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했다.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는 그 분을 만난 적이 없는 사진만 보았다. 그 후는 몇번도 뵌 적이 있다. 최 목사가 그 당시, 아현동에 위치한 새마을 병원을 언니와 함께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관여했다.Q: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아이 문제와 관련해서 부모국을 했다. 그 사실을 박 이사장은 언제 알았나?A:그때 알았다. 언니도 그 일로 매우 힘들다. 새마을 봉사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많은 잡음과 투서가 정보 기관이나 청와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곳 곳에서 잡음이 많이 일어나서 아버지까지 확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Q:박정희(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근혜(쿵에), 콘령(쿵료은)의 2자매는 신당동 사저에 잠시 거주 기업가들이 준비되어 준 성북동에 주거를 옮겼다. 성북동의 생활은 신당동보다는 편한 것?A:성북동에 이사할 때 할 일이 쌓였다. 신당동 사저는 너무 좁아 짐도 풀지 못했지만, 성북동에서는 짐을 정리할 공간이 되어 본격적으로 서류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총무처와 대학 도서관학과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함께 작업했다.Q:성북동 시절에도 최 야스토시(최·태민)목사가 박근혜 전 대표의 일에 관여했는지.A:새마을 봉사단 일에 대해서 거의 매일 논의했다고 듣고 있다. 그런데 육영 재단 사건 때문에 나중에 들은 구호를 보면 최·태민 목사가 오해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전횡을 한다는 내용이었다.Q:1990년 8월 14일 박지만(박·지만)씨와 함께 최 야스토시(최·태민)목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탄원서를 노태우(노·테우)대통령에게 썼다. 탄원서가 박·쿵료은 이사장의 친필 여부를 논의가 있었다.A:당시, 탄원서는 내가 자필로 직접 썼다. 동생도 최 목사의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동생이 내 아파트에 와서”최 목사 때문에 힘들”걱정을 많이 했다.Q:탄원서 내용을 보면 최·태민 목사 일가가 금전 사취, 유족에 대한 인격 모독, 부모에 대한 명예 훼손 등 18항목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A:오래 전에 썼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정보 기관이나 수사 기관에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 육영 재단의 비리를 잘 알고 있던 직원들은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은 거절”과 피켓을 들고 규탄했다. 육영 재단과 기념 사업회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것은 다르다. 큰일 났다”이라며 하루 빨리 누나가 그 사람들(최·태민 일가)와 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탄원서에서 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박 대통령이 1998년에 정치를 시작한 것도 최 타이 국민의 영향이 컸다는 후문이다. 구국 선교단이 이름을 바꾼 새마을 봉사단 시대에는 박 대통령이 “새마을 교주”로 불렸다고 조 씨는 전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새로운 마음, 새로운 마음의 교주라고 말했다.”조씨는 초기부터 최태민과 박 대통령은 “완전히 하나”였다고 말한다. “아, 그 전에도 두 사람은 아주 불가분한 관계인 것 같아.”박정희(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박 대통령은 최 야스민(최·태민)씨의 역삼동 자택을 3일 1번 찾았다고 한다. “아무튼 잘 왔어요. 모두들 피하게 눈에 띄지 않도록. 오면 연락이 오면 모두 피해서””둘이서 들어가면 밥은 문에 놔두면 할아버지(최·태민)이 가지고 들어와”최 타이인들은 박 대통령의 동생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까지 박 대통령과 가까워지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구국 선교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조·이순재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군 헤를 잡으려고 생각하고(최·태민이 경계하나요?)편지”박 대통령이 동생 궁료은, 지만 씨와 떨어진 것도 최·태민 씨의 틀어진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거의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그 동생들이 컴플레인하니까 그래서 자기들끼리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조승재는 녹음 기록 작성 후 1년 만에 사망했다. 2007년 12월 20일 17대 대선 다음 날이었다.TV조선 인터뷰TV조선 인터뷰고 최태민(1994년 작고) 씨와 20여 년간 교류한 충남 서산충성교회 정기용 목사(76)가 국민일보에 증언했다. 예장종합총회 총회장 정기영 목사는 영세 교주 최태민씨에 대해 “주술가이자 무당”이라고 평했다. 최순실씨의 아버지이자 사교적 영세 교주였던 최태민(1994년 작고)씨가 박근혜와 나는 영적 세계의 부부라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씨는 또 “제가 육영수 여사로서 빙의한 몸이 돼 박근혜 앞에서 말하자 그 자리에서 기절해 깨어나는 입신을 했다”고 말한 것으로 파악됐다. ‘빙의입신’ 대면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씨의 첫 대면 내용이 담겨 있는 중앙정보부 보고자료를 기준으로 볼 때 1975년 3월로 추정된다. 태민이 박근혜를 알게 된 동기는?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맞아 숨진 뒤다. 그 무렵 박근혜에 최씨가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죽은 육영수가 나타나 “내 딸 근혜가 우매하니 네가 그녀를 도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근혜가 최씨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검은색 승용차가 최 씨가 길을 닦는 곳으로 왔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박근혜 앞에서 최씨가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영혼이 옮겨진)됐다며 그녀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를 보고 놀란 박근혜가 기절해 입신했다.입신이라면.A: 입신이란 말은 최 씨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입신은 교리 용어이다. 예를 들어 환상을 보거나 천국이나 지옥을 보거나 뜨거운 성령 체험, 신에 홀리는 등. 놀란 박근혜가 그때부터 최씨를 신령과 같은 존재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최 씨는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나올 텐데 (내가 관리하는 자금이) 서울 안국동 조흥은행에 9000만원, 이자 13억원이 있으니 그걸로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최씨가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고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상함을 느꼈다. 목사인 내가 보기에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유령의 역사였다.Q:한때 최태민 박근혜의 연인설이 돌았는데.들어봤다. 최씨가 내가 나이가 많은데라고 반문하라. 나이가 들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같았다.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체의 부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추문이 끊이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하고 직접 이른바 친국(예전 왕이 직접 중죄를 저지른 자에게 일일이 따지는 것을 한 말)을 했다. 이후 재판에서 김재규는 대통령 살해 이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는 실망감을 안았다.Q: 최씨가 목사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A: 최 씨는 1975년 우리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교육은 받지 못했다. 당시 돈을 몇 원 주고 목사 안수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최씨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신학교는 몇 달이나 1년 만에 목사 자격을 주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Q: 최씨가 신학을 안 했다고 했나.A: 맞아. 한 번은 예배 때 축도가 안 돼서 옆에 있는 목사님이 축도 문구를 써주셨다. 최씨가 축도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그러나 최씨의 말을 들어보면 종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천주교 얘기도 많이 했고… 특히 글을 잘 쓰고 붓글씨를 잘 쓴 기억이 난다.Q: 그렇다면 최 씨는 왜 목사 안수를 받았을까.A: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기독교 세력을 견제했다. 그래서 최씨가 박 대통령의 명을 받은 것이다. 최씨는 어용단체인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어 총재에 취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명예총재를 지냈다. 자금 지원을 계속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Q: 최씨는 교단에서 스스로 나왔나.A: 쫓겨났다. 최 씨는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내고 지금 최순실, 정윤회가 하고 있는 (박근혜대통령을 돕는) 일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절. 최씨는 병을 고쳐 점을 치는 등 주술적인 내용이 많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계속하다 교단에서 쫓겨난 것이다.Q: 최씨의 교계 활동을 증언해 달라.최씨는 영이 다른 사람이다. 산에서 길을 닦는 사람이었다. 목사가 돼 서울 강남에 만남의 교회라는 200평(660m)가량의 교회를 지었다. 신학교도 설립했다. 그의 딸 최순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몬테소리 유치원을 열었다. 나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유령에게 들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거절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주술적인 말씀을 너무 많이 하시니 야, 네 정체가 뭐냐. 누구 앞에서 재능을 발휘하느냐고 외치더니 얼굴이 찌그러져 저쪽으로 달아났다.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다는 사람과 그의 딸 최·숭실이라는 사람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단만 소신을 갖고 운영할 수 없이 당하는 사람이 어찌 일국의 지도자 될 건가-2007년 6월 17일 김·헤호 기자 회견-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최순실 꼭두각시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최순실 꼭두각시김·제규 부장 변론을 맡은 강·신 옥 변호사가<시사 in>에 증언했다. Q. 김 재규 부장이 조사한 내용은?A. 김 재규 부장은 당시 검사로 중앙 정보원에 파견되어 특명 수사를 담당하는 6국장(안전국)흰색 광현(백·김광현)에 구국 여성 자원단의 조사를 지시했다. 백 검사는 최 야스토시(최·태민)을 불러철저히 조사했다. 조사 결과 최·태민은 자칭”태자 마마”,”도사”라며 꿈에 육모·연수 여사가 나타나는, 딸 박근혜를 잘 막아 달라고 부탁했고 박근혜에게 편지를 썼다고 말했다. 최·태민 편지를 받은 박근혜도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고 도우려는 사람이 찾아와서 도움을 달라고 했다”고 했고, 비슷한 꿈을 꿨다는 인연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그 뒤 박근혜는 최·태민이 여성 단체인 구국 여성 자원단 총재가 되는 것에 개입하며 최·태민이 기업에서 양로원을 짓겠다는 명목으로 수억원대의 돈을 가로채는 일에도 관여했다. 박 승규(박·순규 청와대 민정 수석 비서관도 “별도로 최 야스토시(최·태민)씨를 조사한 결과, 영애를 짊어지고 기업으로부터 수십억원을 가로챈 사실이 적발되고 돈 재규 부장에 『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과 호소했다”라고 한다. 김·제규 부장은 최·태민이 여성 정치 지망생 6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내용까지 조사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보를 수집하고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에게 최 야스토시(최·태민)씨와 구국 여성 봉사단을 정리하고 씨를 끊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은 박근혜의 말만 듣고 보고를 묵살했다.경향 신문 김·교은레 전 편집 국장이 “국민 일보”에 증언했다. 그는 “당시 박근혜는 만나지 말라는 아버지의 하명에도 최·태민에 은밀히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이 주색에 빠진 틈을 노리고 파고들면서 박근혜를 앞세우고 각종 이권에 개입한 것이 바로 최·태민, 최·숭실 부녀”이라고 말했다.김 전 국장이 최·태민이랑 만난 것은 1977년 초. “구국 봉사단 여성 국장 김 모 씨와 송 모 씨가 수십장의 문서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피해 사실을 낱낱이 밝혀지만 김 씨는 “최·태민이 영등포 여관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라고 말했습니다. 오전 2시에 가서 나 같은 여성이 한둘이 아니면 10여명의 이름을 올렸습니다”후배 기자들과 함께 확인한 결과 거의 사실이었다. ” 어떡하면 좋을지”과 고민, 박 전 대통령에게 자필 편지를 작성했다. 최 목사와 관련된 정보와 비리를 정리하고 의전 비서관을 통해서 박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편지에 최·태민이 진실의 크리스천이 아니라 성직자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10여개 주요 교단과 신학교 졸업의 여부를 문의했지만 최·태민의 이름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애 박근혜가 비윤리적인 사기꾼 목사에 놀고 있으니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박 대통령이 “유사 종교에 빠지지 않았다”고 밝힘에 대해서,”맹신자, 광신자가 아니면 왜 40년간 최 씨 일가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라고 반문했다. 또”박 대통령이 영혼을 빼앗기지 않는 한 중앙 정보부의 보고서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김 전 국장은 “박 대통령은 최 야스토시(최·태민)최 준 사실(최·숭실)부자의 정신과 사상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이들 행사에 참가하고 도움을 준 “이라며”최 준 사실(최·숭실)은 최근까지도 종종 점집을 드나드는 점을 받고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세계 일보가 공개한 전·윤 회 문서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십상 무사들과 정·융후에의 모임에서는 공공연히”이 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숭실, 2위는 전·윤 회, 3위는 박근혜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자신의 옛 애인이 나운(” 낳았다”의 오자로 추정)딸을 어떻게 배척할 수 있는가”라는 극치의 말이 서로 오가고 있다. 함한나라당 전여옥(정·요옥)전 의원이 저서 『 오만과 무능 』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박정희(박·정희가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에서 근무했다는 사람이 전여옥(정·요옥)을 찾아 박근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박근혜는)최·태민에서 전화가 왔다면 밤 12시가 지나서도 만나러 갔습니다. 그 때는 통금이 있었군요. 갑자기 밤에 영애가 움직이니까 경호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제가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이 영애와 최 모, 태민 관계를 매우 걱정했어요. 그래서 영애의 모든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내용은 정말 정말 말씀 드리기가 충분하지 않나.”박·쿵료은의 남편인 신·동욱은 “육모·연수 여사 서거 이후 최·태민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육모 여사가 살아 있을 때 최·태민이 등장했다.”로 “1973년 박근혜 영애가 공식·비공식 행사에 참가했지만 최·태민도 그런 행사에 등장한 “이라고 밝혔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엄마가 살아 있을 때부터 형부가 최·태민을 만났다는 얘기. 실제로도 육모·연수가 살던 때부터 최·태민이 박근혜를 만났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접촉한 기록은 육모·연수가 살던 때도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최면술에 호기심을 품은 육모·연수가 직접 본보기를 보려고, 비공식 행사에 최·태민을 불렀다. 일설에는 박근혜가 사춘기에 들어가서 공부를 멀리하자 장·중식 전 단국대 총장 부인의 소개로 최·태민이 청와대로 들어와서 박 대통령을 최면술로 치료했다고 한다. 최·태민이 청와대 요로로 청탁을 넣어 큰 연 정에게 만났는데, 박근혜는 방에서 최·태민을 만나고 20분 후에 환하게 웃은 얼굴로 나왔다고 한다.최·숭실과 이복 남매의 최·태민 아들은 “육모·연수 여사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가 청와대를 출입했다.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을 맡기면 되는데 그냥 딸을 맡기는 것?”로 육모·연수가 살던 때부터 최·태민과 박·정희는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의 집권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도 신변의 위협을 받다 박근혜는 도덕성, 이념에 문제가 있어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답답하고 원통해서 말한다. 박근혜 안전 보장 안전 보장하는 것은 모두 헛일이다. 북한 첩보 라인(장자 강포구 로아)과 이미 관련이 깊다. 또 이 사실을 아는 분은 이·한 목사 및 고발장을 쓴 것을 본 사람들이다.-조 은 목사박근룡의 남편 신동욱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최태민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육 여사가 살아있을 때 최태민이 등장했다.”며 “1973년 박근혜영애가 공식·비공식 행사에 참석했는데 최태민도 그런 행사에 등장했다”고 밝혔다. # 쉽게 말해 자신의 장모가 살아있을 때부터 매형이 최태민을 만났다는 이야기. 실제로도 육영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최태민이 박근혜를 만났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접촉한 기록은 육영수가 살아있을 때도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최면술에 호기심을 품은 육영수가 직접 시범을 보이고자 비공식 행사에 최태민을 불렀다. 일설에는 박근혜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공부를 멀리하자 장충식 전 단국대 총장 부인의 소개로 최태민이 청와대에 들어와 박 대통령을 최면술로 치료했다고 한다. 최태민이 청와대의 부탁을 넣어 큰 영애를 만났지만, 박근혜는 방에서 최태민을 만난 지 20분 만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왔다고 한다.최순실과 이복 남매 최태민의 아들은 “육영수 여사가 살아있을 때 아버지가 청와대를 드나들었다.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자기 딸을 맡기면 되는데 그냥 딸을 맡기는 거야?”라며 육영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최태민과 박정희는 알고 지낸 사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의 집권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하는 말이다. 아직도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 박근혜는 도덕성 이념에도 문제가 있어 절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인물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자 답답하고 억울하게 말한다. 박근혜안보, 안보하는 것은 모두 헛수고다. 북한 첩보라인(장자구로아)과 이미 깊이 연관돼 있다. 또한 이 사실을 아시는 분들은 이한 목사 및 고발장을 쓴 것을 본 사람들이다.- 조은 목사